성인 ADHD에 관한 고찰

 

어릴 때는 뭔가 시야가 안 맞다, 앞에 있는 물건과 나의 거리감이 안 느껴져서 잘 부딪힌다, 방향감이 잘 안 느껴진다, 운동신경이 떨어짐, 기억력이 분명히 좋은데 이상하게 중요한 숙제는 잘 까먹는다, 학교 가기 너무 싫다 정도로 생각했음.

 

공부 머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서 고등학교 성적은 사교육 1도 없이 인서울권이었음.

(근데 귀찮아서 집 근처 학교 간다고 원서 냈고 그날 담임한테 욕을 강아지처럼 먹음)

우리 집에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어서 별로 말할 거리도 아님.

그냥 좀 뭔가 이상하다 는 생각만 했던 것 같음.

 

묘하게 낙천적인 면이 있어서 나는 무언가 남과 다르다 > 그래서 유니크하다 > 음 좋아 로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.

 

무지하게 생각이 많은 편이기도 했는데 F가 아니라서 감정 과잉이나 우울한 방향으로 땅파는 고생은 그닥 하진 않았음.

 

그렇게 살고 있다 보니 어느새 30살이 훨 더 넘었고..

 

인터넷에 성인ADHD 증상이라는 걸 보다가 '헐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?' 라고 잠깐 고민을 하게됨.

주변에 성인ADHD로 약을 드시는 분이 있는데 나랑 유형이 워낙 달라 보여서 의심도 안 하고 살았단말임.

 

내 증상은,

중요한 일정 까먹음+메모조차 하는 것도 까먹음+가끔 메모를 해도 메모장이 일억오천만개라 메모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남+장기 프로젝트에 마감 엄수가 어려움+약속에서 맨날 지각함+충동 구매+과다 행동(말이 빠름)+쉽게 욱하는 성질 머리가 대표적이었음.

 

그리고 추진력이 좋을 때는 모터가 달린 것처럼 일을 하는데 그 추진력이 힘을 잃으면 하기 싫어서 손을 딱 놓게 됨.

그러니까 미리 계약해놓은 마감을 못 지키고 으 하기 싫어 상태가 되서 미루고 미루다가 그냥 뻗는데,

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계약이 몇 번 엎어지니까 현타가 오기 시작했음.

 

그래서 어느 날 정신과 의사한테 비웃음 당할 각오를 하고 병원에 감.

 

"SNS에서 성인ADHD 증상을 봤는데 제가 성인ADHD인지 의심됩니다."

의사 선생님도 "아 인터넷에서 보고...ㅎㅎ" 라고 처음에는 그러셨지만.....

어릴 때 썰 몇 개를 들으시더니 이건 뭐 거의 너는 절대 ADHD다 라는 확신에 가까운 표정이 되셨음.

 

어릴 때 썰 : 우산 잃어버린 거 다 합치면 여러 수 백개, 신발도 자주 잃어버림, 엄마 손 잡고 길 가고 있는데 모르는 아줌마 손 잡고 있음, 평소 잘 아는 귀가 길도 어느날 못 찾아가고 뇌 정지되서 학교로 다시 돌아가다가 미아로 신고 당함

 

무슨 엄청나게 많은 질문 테스트지부터해서 머리에 하는 검사에 이것저것 개비싼 검사를 몇 번 반복했고,

며칠 뒤 나는 성인 ADHD 진단과 함께 약을 처방 받았다.

 

엥 내가 진짜 ADHD였을 줄이야...

막연하게 ADHD는 산만하고 폭력적인 유형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처럼 얌전한 유형도 있는 모양이었다.

 

그러다가 문득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는데 나랑 성격, 정신 없는 생활 스타일, 정리 정돈에 어려움, 잘 욱하는 성질머리 등등 무척 비슷한 우리 아버지도 ADHD인 듯 하다. 그렇다. 유전이었다. (아버지가 더 심하다.)

 

우선 처방 받은 약을 먹으니까 진짜 신기한 건 생각이 많이 없어짐.

본래 밤에는 불면증, 아침에는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었는데 밤에 잘 자고,아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슥슥 씻고 나가는 나를 발견하는 거다..

 

한동안은 신기하기도 하고,의사 선생님 권유로 약 증량도 제법 했는데문득 아 이 모습이 멀쩡하긴 하는데 별로 나 같지는 않다.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함.

 

본래 줄 서는 걸 싫어하고 기다리는 것도 진짜 진짜 싫어해서 줄 서는 맛집은 가볼 생각도 안 하는데 병원 웨이팅에 레알 정신병 도질 것 같았음. 아니 정신과에 사람이 왤케 많은 거임??

 

그래서 그냥 약 끊고 병원 안 감. 귀찮음... 흥미 떨어짐.하지만 다시 현타오면 병원을 찾게 되지 않을까?하는 막연한 생각은 함.

 

결론)그냥 이대로 정신 없이 삽니다.